본문 바로가기

소설 끄적끄적

사샤의 일기

친애하는 브레타에게.
어제는 편지 쓰는 걸 깜빡하고 그냥 잠들어버렸네. 미안해 브레타.

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어제 정말 바빴거든!
저번에 곧 어느 저택에 하녀로 가게 될 것 같다는 말했었잖아. 얼마 안 돼서 가겠거니, 생각했는데 그게 어제더라고.

정말로, 웬 커다란 사람들이 데리러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! 원래 하녀를 이렇게 데리러 오기도 하던가? 책에서 볼 때는 항상 추운 겨울에 혼자 저택까지 걸어가던데 말이야.

하여튼, 그렇게 내 동네인 켄델리아를 떠나서 블루룬으로 들어갔어. 차를 타고 갔는데 등받이가 너무 푹신하더라. 역시 돈이 좋긴 좋나 봐.

그리고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,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. 세상에 그렇게 큰 집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니까. 커다란 철창 같은 게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길래 공원인가 싶었는데(걸은 것도 아니고 계속 차를 타고 갔어. 근데 분수랑 나무, 꽃밭, 보기 좋게 난 풀들이 몇십 분 동안 계속 보이더라고!)공원이 아니라 그냥 그 저택 정원이었던 거야. 내가 여태껏 살았던 집은 개미집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초라하게 느껴진 거 있지.

그 큰 정원을 다 지나고 드디어 저택 본관(여기도 말도 못 하게 크더라. 별관도 따로 있다던데 얼마나 돈이 많아야 이런 큰 집에 살 수 있는 걸까? 성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아...)에 들어간 뒤엔, 크리티아스라는 하녀장님이 날 맞이해주셨어. 줄여서 티아라고 부르기도 한다던데…. 이건 일단 나중에 말할게.

오자마자 그날부터 입을 옷을 받고 앞으로 지낼 방까지 안내받았어. 방은 허름하지도 않고 오히려 깔끔하더라. 2인용 방이라 룸메이트도 생겼는데, 걔 이름은 메이래. 인사도 잘해주고 이것저것 알려주는 게 앞으로 금방 친해질 것 같더라구. 앗,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는 계속 너일 테니까. 질투하면 안돼, 브레타?

메이는 나한테 일어날 시간과 방으로 돌아오는 시간, 저택에서 해야 할 몸가짐, 우리가 보통 하는 일 같은 것들을 알려줬어. 저택 주인님 두 분이랑 도련님 한 분이 저택에서 지내는데 다들 깐깐하진 않아서 하녀랑 시녀들이랑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시나 봐. 소설에서 본 거랑은 완전 딴판이더라. 하지만 그래도 실수를 자주 하면 잘릴 수도 있다고 하니(이것도 들은 일화가 있는데 다음에 말해줄게!) 웬만해선 골치 아플 만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대.

아,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버렸네.
어쨌든, 난 저 설명을 들은 후에 하녀장님이 불러서 청소할 곳을 지정받고 그날 죽어라 청소했어. 안 쓰던 다락방 하나(굳이 말 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지? 엄~청 넓었어.)를 말이야. 그것도 나 혼자서! 먼지 쌓인 것들만 털고 바닥이랑 창문만 닦으라는데 말이 쉽지 도대체 쌓인 먼지가 얼마나 있는 건지 방은 온통 깜깜하고, 다락방이면서 창문도 또 얼마나 많은지! 밤을 새워서 청소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저녁쯤에 메이가 슬슬 정리하고 나와도 된다고 일러주길래. 겨우겨우 마치고 빠져나왔어. 메이가 안 왔더라면 난 아마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.

참, 그다음에는 나 도련님 만났다? 사실 도련님 얼굴도 몰라서 내가 못 알아보고 인사도 없이 지나쳐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, 척 보니까 도련님인 걸 알겠더라고. 얼굴에서 빛이…. 이런 걸 후광이라고 하는 걸까? 했다니까.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건데 그 금발이...

브레타, 그 모습을 너도 한번 봤어야 했는데. 뮬랭카의 자랑거리라고 바깥에 내걸어도 될만한 모습이었거든. 아마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허풍떤다고 생각하겠지? 저엉말 내 회중시계를 걸고 아니야!

도련님이랑 마주치자마자 난 얼어버렸어. 아니, 사실 몸만 자동반사적으로 얼어버린 거지 눈은 똘망똘망 했지만. 복도 끝에 있던 도련님을 우연히 본 거였는데, 어찌 된 건지 도련님이 내 쪽으로 걸어오시더라고. 오면서 나한테 건네주셨던 말도 기억나. '이번에 새로 온다던 하녀님?' 난 대답도 못 하고 뻣뻣하게 고개만 끄덕였어. 그야 그 후광 나는 사람이 나한테 성큼성큼 가까워져 오니까…. 와중에 미소는 또 어찌나 예쁘던지. 눈앞까지 다가오셨을 땐 얼굴을 더 보고 싶긴 했지만 보통 하녀들은 주인님이라든가 도련님이 다가오면 고개 숙여서 인사를 해야 하니까.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지. 근데 그분이 또 말씀하시더라고!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할 필요 없다고, 세상에나 너무 상냥하지 않니? 호칭도 도련님 같은 거로 부르지 말고, 그분 이름인 컨택트라고 편하게 부르라고도 허락해주셨어. 저택으로 팔려 왔다고 지레 겁먹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 없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지. (물론, 첫날부터 일 때문에 몸이 고되긴 했고 앞으로도 힘들 예정이지만 눈은 호강하니까!)

근데 그 좋은 순간에 복도 멀리에서 하녀장님이 부르니까 얼른 오라고 입 모양으로 재촉하는 메이가 보이더라. 그분도 따라서 복도 쪽을 보시더니 바쁜데 잡은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 가봐도 된다고 날 보내주셨어. 단 거 좋아하면 간식으로 먹으라고 손에 초콜릿도 쥐여주시고. 난 아쉽긴 했지만 하녀장님이 부르는 걸 거부할 수는 없으니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에 메이가 있는 곳으로 갔지. 흑심 같긴 한데 다음에 도련님이랑 또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. 그분이랑 잘 되고 싶다던가 하는 건 아니고, 순수한 팬심 같은 걸로 말이야. 하녀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도련님을 또 어디서 만나겠어. 안 그래, 브레타?

이런, 세상에 벌써 4장째가 됐네.
내 편지 읽느라 아주 눈이 찌뿌둥했겠어.
슬슬 편지 끝내줄게. 하하.

결론은, 난 네가 걱정할 필요 없이 아주 잘 지낼 것 같다는 거였어. 그니까 너도 나 없이도(원래도 혼자 잘 지내기야 했겠지만.) 잘 지내고. 편지는 꼬박꼬박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. 알겠지. 브레타?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랄게.

ps.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, 답장은 안 보내도 돼!

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사랑을 담아서, 사샤가.

'소설 끄적끄적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Limbus_Peach  (0) 2023.03.17
Recent Posts
Popular Posts
Tags
더보기
Recent Comments